2021.05.14

의문4

210514_column

군에서 제대할 때까지만 해도 집으로 돌아가면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리라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집에 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군에서 치료불가능으로 쫓겨난 셈이란 것을 알아차렸고, 부모님은 나를 위해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다는 것도 알았다.
뭔가를 해주고 싶어도 경제적으로나 여러 가지 여건으로 불가능했다.
어릴 적부터 나는 마음에 스스로 일어서야 한다는 것을 다짐했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실제 확인하게 되었을 때만큼 비참한 일이 또 있을까?
경제적인 여력이 있다 해도 산중턱 다닥다닥 붙은 좁은 골목의 안쪽 집에 있는 내가 병원까지 운반되어 간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거의 불가능했다.
군 병원에서 퇴원해서 집으로 돌아올 때도 산복도로까지 병원차가 데려주었고, 그 이후 위생병 하사가 나를 업고 50미터나 가파른 골목길을 올라 집에 내려놓았었다.
그래도 한 가지 희망은 교회 집사님 가운데 유명한 신경외과 원장이 계셨는데 그분이 와서 진찰을 하고 뭔가 길을 제시해줄 것이라는 실낱같은 것이었다.
어느 날 주일 예배를 마치고 집사님이 우리 집을 방문했다.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나는 말했고 그분은 들었다.
다 듣고, 여러 가지의 질문을 나에게 했고 내 상태를 손으로 만지면서 이리저리 진찰을 했다.
그리고 국군통합병원의 담당의사와 같은 말을 했다.
수술을 시도할 수는 있으나 치료는 장담할 수 없고, 자기 소견에도 수술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본다는 것이었다(해봤자 소용이 없으므로).
병원에 입원을 한다 해도 군병원처럼 그냥 침상에 누워서 회복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되는 것이다.
나는 우주에 버려진 불필요한 존재였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어느 누구도 나를 도울 수 없었다.
이제 내 인생은 어떻게 되는 것이며, 어떻게 이어져 나갈 것인가?
나는 완전히 식물인간처럼 되어 버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이 가장 나은 일로 보였다.
내가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하는 자이며, 살수록 주변 사람들을 더욱 어렵게 한다는 사실을 깨닫자 나 자신을 용납할 수 없는 괴로움에 시달렸다.
모든 수발은 어머니의 몫이었고, 스무 살이 넘은 아들로서 연약한 어머니에게 부담을 안겼다는 점도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하루 이틀, 하루는 24시간, 1시간은 60분, 1분은 60초, 하루가 천년과 같았다.
그래도 알량한 자존심이 있었는지 1개월 이상을 어떻게 해서든 일어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하는 생각들을 골똘히 했다.
내게는 낮과 밤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
낮이든 밤이든 항상 누워 지냈기 때문에 잠이 오면 자고(일한 것도 없고, 수많은 상념들로 지내기 때문에 단잠을 이룰 수 없었다.), 잠이 오지 않으면 깨어있는 시간이 된다.
그때 책을 보면 되지 않냐고? 책 봐서 뭘 하는데? 아무 쓸모없는 일인 것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니, 아예 생각도 하지 않았다.
과학은 나에게 어떤 일도 할 수 없다고 판단을 했다.
과학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그래도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은 우연이든지, 하나님의 역사뿐이다.
우연을 기대할 수 있을까?
집으로 돌아온 지 한 달이 넘어가면서 하나님의 긍휼을 간구할 수밖에 없음을 자각해 가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나 자신의 의지가 나약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들이 심란하게 놀려댔지만 그것 아니고서는 다른 길을 찾을 수 없었다.

아,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낼 수 있는가?
오직 하나님밖에 없었다!
과학은 세상이 빅뱅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빅뱅은 피자 한 조각보다 훨씬 작은 점 하나에서 일어났다고 말한다.
그들의 주장이 맞다고 해도 그래서 어쩌겠다는 것인가?
그 과학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며, 우리의 인생을 풀어가는 열쇠를 주는 것인가?
편리함을 추구하고 궁금함을 풀어가는, 한편의 세상이나 인간에 대한 파악은 될지 몰라도 인생이나 세상의 문제들을 궁극적으로 해결해주지는 못한다.
내가 하나님을 확인하거나 믿음이 좋아졌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시작한 것은 아니다.
어쨌든 기도를 시작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바라면서.
그러나 기도하는 내내 ‘쓸모없는 짓’과 ‘오직 유일한 일’, 내가 어느 쪽 일을 하는 걸까? 머리 속에 혼란을 일으켰다. 마치 카오스처럼.
정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밖에 없었다. 기도하는 일.
이것마저 하지 않으면 나는 미칠 것이다.
어머니가 기도할 때 난 ‘무슨 쓸데없는 일을 하는가?’ 하는 생각들을 했고, ‘힘들여 기도하는 것보다 쉬는 것이 낫고, 공허한 기도보다는 실제적인 일을 하나라도 더 하는 것이 낫다. 기도는 의지력이 약한 자가 하는 행위가 아닌가?’ 하는 경박한 생각들을 했었다.
그러나 이제 내가 해야 하는, 또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기도였다.
건방진 자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쉽지도 않고 면목이 없는 일이다.
“하나님, 미안하지만 그 동안 나의 교만을 용서하시고 조그만 긍휼이라도 베풀어주셔서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정도의 삶이라도 살 수 있도록 해주옵소서.”
어정쩡한 기도에서 점점 간절한 기도로, 그리고 처절한 기도로, 밤낮으로 부르짖는 기도로 변하고 있었다.
부끄러워서 큰소리를 내지는 않았는지 몰라도 나는 마음을 찢고 또 찢었다.
절박하니까, 이 길밖에 없으니까!

얼마나 기도했을까? 나도 잘 모른다.
그러나 기억을 더듬어 보면 거의 6,7개월 이상이었던 것 같다.
아마 이 세상에는 나와 같은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더러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의 처지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나는 나 자신만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고 처절한 사람으로 여겼다.
오직 하나님의 손길만 의지했다.
사방의 문이 닫혔기 때문에 하늘의 문을 열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밤 자정이 넘어 달빛이 창살을 통해 내 방을 영롱하게 비추고 있었다.
잠이 오지 않을 때는 기도하는 것이 일상이었기에 그날은 달빛 아래 기도하기 가장 좋은 날이라고 생각했다. 긴 기도를 마치고 잠깐 눈을 떴다. (잠이 오면 잘 것이고, 오지 않으면 계속 기도할 요량이었다.) 아름다운 달빛을 보기 위해.
여전히 달빛은 창살 사이로 내 방을, 그리고 나를 비추고 있었다.
문득 그 빛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창조 시 아름다움이랄까?
성경을 잘 몰랐지만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러 가기 전 아브라함을 방문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나도 모른다. 그냥 그렇게 생각이 들었고 신비로운 기쁨과 강력한 평화에 사로잡혔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인가?’ 불현듯 생각이 스쳤다.
나도 모르게 약간 전율을 느꼈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다리가 움직여지는 것이므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마음에 기대했다.
설마 그런 일이 일어나겠어요? 벽에 기대어 앉아있던 내 허리가 몇 번 요동쳤다.
순간 불안이 엄습했으므로 누워야겠다고 생각하고 자리에 누웠다.
신기한 것은 조금 지나고 발가락을 움직여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움직여지지 않겠지만 그래도 한 번 시도해보고 싶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누워서 멀리 떨어져 버려진 섬처럼 여겨졌던 발가락이 경미하게 움직인 것이다.
처음에는 착각인 줄 알았다. 너무 간절히 바라므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일단 자고 내일 새벽에 다시 확인해보자!
다음 날 새벽에 잠이 깨자마자 발가락을 다시 움직여봤다.
사실이었다.
그 뒤 3여개월 동안 식구들의 도움으로 땀 흘리며 재활훈련을 했다.
드디어 다시 걷게 된 것이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어라! 그래서 순간 걷게 된 기적은 아니었다.
수많은 시간 동안 기도했고, (주변에서 많은 분들이 기도해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나의 문제를 놓고 기도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걷게 된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듣기를 원하신 것으로 알고 있다.

이제 나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의심’은 더 이상 필요가 없어졌다.
그 의심 자체가 가치가 없는 것이었고, 한가하고 사치스런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문이 사라졌기 때문에 믿음이 좋아졌는가? 아니다.
의문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 의문을 해결하고 풀어내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었다.
은혜의 경험이 인격적인 삶으로 연결되기 위해서는 단련의 세월이 요구된다.
그 뒤에도 신앙은 출렁거렸다.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태도가 오락가락했다는 말이 아니다.
신앙을 온전히 그리고 삶에 안착시키는 데 시간이 걸렸다.
야, 억세게 고집 센 사람이구나! 그렇게 말해도 할 말이 없다.

(다음에 계속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