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4.29

의문2

210429_column

고등학교 시절 나는 영적인 이중생활을 한 셈이다.
학교에 가면 기독교인의 대표인 양 취급을 받고 교회에 오면 세상 사람들의 대표인 양 질문을 던졌다.
이것은 신앙에 중심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고, 당시 과학과 신앙이 대립하는 현실에서 나 자신이 혼란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는 한창 진화론을 설파하고 그렇게 말하는 선생님은 가장 과학적이고 진보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으로 취급받아서인지도 모른다.
“우리 인간은 어떻게 해서 존재하게 되었을까? 과학적인 연구에서 증명된 바로는 원숭이에서 진화된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인데 기독교는 뜬금없이 창조주로부터 창조된 피조물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어떻게 창조되었으며 그 창조주는 누가 창조했는지 증명할 수 없다. … 반장, 넌 어떻게 생각하나? 네가 기독교인이라며?”
나는 이름이 있지만 주로 ‘반장’으로 불렸다.
학급의 반장이었기 때문이지만 선생님들이 반장, 반장 부르니까 반 친구들도 반장으로 불렀다.
신앙생활을 잘 하는 우리 반의 한 급우가 우리 학교에 기독교 동아리를 만들었다.
나의 승낙을 받지 않고 나를 회장으로 기록해서 학교에 등록했다.
그러고 나서 나에게 그렇게 했노라고 말했다.
나는 싫다고 했지만 서류로만 그렇게 하자고 부탁해서, 동아리에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음에도 나는 ‘기독교 신앙운동’의 회장이었고 선생님들에게 그렇게 회자가 된 모양이었다.
그러니 과학과 신앙이 충돌하거나 신앙에 대한 이야기가 학급에서 나오면 공격의 화살이 나에게 날아올 수밖에 없었다.

나는 과학 선생님의 비아냥거리듯 하는 질문에 순간적으로 어떻게 답해야 하는지, 답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고민에 빠졌다.
하나님의 창조를 주장하자니 그다음에 날아오게 될 질문들에 대해 신앙적으로 답변할 자신이 없고, 선생님의 말씀이 맞다고 하자니 하나님 앞에서 해서는 안 될 일 같았기 때문이다.
“반장, 일어나서 말해봐.”
선생님의 다그치는 말이 내 귓전을 때리고 나서야 걸상에서 일어났다.
뭔가 말해야 했다.
“그러면 선생님은 원숭이 후손이라는 말씀이시지요?”
반이 뒤집어졌다.
원숭이 모습과 선생님의 모습이 오버랩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순식간 선생님은 눈이 커지고 얼굴이 상기되었다.
“그러면 넌 없는 데서 있는 것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믿냐? 어떻게 해서 없는 데서 있게 되냐? 그러면 하나님은 누가 창조했냐?” 선생님의 음성은 격앙되었다.
“그건 저도 직접 안 봤기 때문에 모르겠습니다.”
또 한 번 학급이 뒤집어졌다.
아이들은 선생님을 난처하게 하는 것이 통쾌한지 책상을 두드리기도 했다.
벌써 우리 반은 진화론과 기독교신앙의 대립 장이 되었고, 두 대표가 맞서 싸우고 있는 것이다.
최소한 그런 형태가 되었다는 말이다.
급우들은 마치 격투기를 보는 듯이 긴장감에 휩싸여 흥미진진하게 구경하고 있었다.
“너만 안 본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 모두가 안 본 것이다. 그런데 보지도 않은 것을 믿는다고?”
멍청한 사람들이라는 듯이 경멸의 눈초리를 보냈다.
“그런 것 같습니다. 안 본 것은 진화론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선생님은 원숭이가 사람으로 변하는 것을 보셨습니까? 또 원숭이는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반 급우들은 “그렇지!” 하면서 격한 호응을 보냈다.
선생님은 버릇없이 대꾸한다는 듯이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이 정도 하고 끝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했다.
선생님은 자존심이 몹시 상했던 것 같았다.
“과학은 근거를 가지고 가정하고 그것을 증명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신앙은 그냥 믿어버린다는 것이 비과학적이라는 것이야! 비과학적인 것을 우리는 믿을 수 없어!”
나는 더 이상 선생님과 불편한 관계가 되기 싫었다.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선생님은 성이 덜 찼는지 “왜 답 안하고 앉아? 할 말이 없냐?”
다시 일어났다.
“근거와 가정이 맞는다고 다 맞는다고 할 수 없고, 기독교도 무턱대고 믿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창조주의 영역은 우리가 모르기 때문에 그분이 하신 말씀들을 보아 옳고, 그렇게 살아야 하는 점을 확인하면서 그분의 인격을 믿고, 그리고 그분을 섬깁니다.”
(이 내용은, 이런 말을 한 것은 사실인데 다소 투박했을 것이므로, 기억을 되살려 지금의 마음으로 다시 정리한 것이다.)
그다음은 어떻게 되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 후로 학교에서 나는 명실공히 기독교 대표가 되었고, 선생님들 사이에서는 ‘1반 반장에게는 질문을 조심해야 한다.’로, 친구들에게는 ‘공부시간에 공부하기 싫으면 반장을 시켜 선생님께 질문하게 하면 된다.’로 통하게 되었다.
오해하지 마시라.
그렇다고 나는 신앙이 제대로 정리되었는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교회에서 가르치거나 설교를 하면 진화론을 따르는 사람의 입장에서 질문을 하게 된 것이다.
이런 행위는 나의 신앙을 정립하고자 하는 바람도 있고, 또 학교에 가면 언제든지 나에게 날아들 신앙질문에 대한 답변을 준비하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그 뒤 과학 선생님은 우리 학년을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나와 만날 일이 없었는데 1여 년 흐른 뒤 학교 정문 앞 길에서 나와 마주쳤다.
나는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정문 앞이라 다른 쪽으로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어이, 반장!”
선생님이 손짓하며 나를 부르셨다.
나는 멋쩍게 다가갔다.
선생님은 웃으면서 내 어깨를 부드럽게 쳤다.
“야, 너, 그날 답변이 훌륭했다. 사실 나도 기독교인이다. 집사야.”
나는 미소만 짓고 말이 없었다.
충격이었으니까.
“잘 지내라. 나에게도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는 헤어졌다.
무엇이 도움이 되었는지 모르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기뻤지만 왜 다른 한편으로는 왜 그리 슬픈지 알 수가 없었다.

우리는 모두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믿고 살 수밖에 없나보다.
진화론은 과학적이고, 과학자들은 대부분 진화론의 방식으로 모든 것을 이해하고 해석한다.
그러나 진화론조차 수많은 허점과 설명 안 되는 비약들을 가지고 있다.
가령 무엇이 원숭이가 되었는지, 원숭이가 정말 사람으로 변하는 과정을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는지 등, 그것을 믿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과 믿음이라는 점에서는 별 차이가 없다고 본다.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와 인격을 믿으므로 그의 섭리하심을 믿는다.
그러나 진화론자들이 몇 가지 근거와 과정을 통해 유추함으로 그렇게 된 것이라 믿는데 이것은 인격적인 믿음은 아니다.
그들은 자연의 선택을 설명에 필요한 조건으로만 받아들인다.
만약 자연선택이라는 것이 축복과 심판을 가져온다고 믿는다면 스스로 진화론을 위배하는 것이 된다.
원숭이가 인간이 된 것이 자연의 선택으로 된 것이라면 자연은 신(神)인가?
그 자연은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그 자연을 신뢰해도 되는 것인가?
무책임하고 제멋대로 되는 것이고, 된 것을 놓고는 ‘자연의 선택’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뒤에 숨으려고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이것들은 나의 짧은 지식과 생각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나 그때 내 마음은 우리 인간은 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한 답변을 얻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었다.
(다음에 계속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