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25

의문 5

210526_column

이 주제의 글이 시작된 것은 “왜 인간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하고 즐거워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던진 것에서부터이다.
이 문제를 나는 어떻게 풀었는가를 설명하다 보니 내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하는 것’을 신학적이나 논리적으로 증명하기보다는 나 자신이 어떻게 이 의문에서 벗어났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잇자면, 죽음과 절망의 터널을 지나오면서 하나님께 기도했고, 하나님은 긍휼히 여기셔서 회복시켜주셨다.
이 은혜는 무엇으로 갚아야 할까?
기도하면서 명확하게 서원하지는 않았지만 정말 좋은 크리스천이 되겠다고 말씀드렸다.
이것도 서원이라면 서원일 것이다.
회복되어 걷게 되자 나의 인생에는 대전환이 일어났다.
이전처럼 살아서는 안 되는 것이 분명했다.
도스토옙스키가 사형 직전에 살아나게 된 후에 남은 생의 시간들을 요긴하게 보낸 것처럼 나도 그런 마음으로 살기로 했다.
우선, 잡비라도 벌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했는데, 그것은 조그만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일이었다.
이것이 나의 젊음을 바꾸어 놓는 사건이 될 줄 몰랐다.
중학 1학년생을 가르치는 것에서 시작해서 2년 만에 대입 수험생을 가르치는 강사가 되었고, 조그만 학원에서 대형학원 강사로 바뀌었다.
나에게 이런 재능이 있나 싶을 정도로 인기를 끌게 되었다.
문제는, 아르바이트생이 아닌 직장인이 되자 여러 강사들과 어울려야 하는 일이 벌어지고 학원장의 권유로 다른 강사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라도 회식자리를 드나들게 된 것이다.
병에서 회복한 뒤 1년은 정말 모든 일에서 신앙인으로서 모범적으로 살려고 했다.
그러나 세상의 물을 먹고,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강사들과 부딪히면서 “그러면 안 되는데…” 한탄하면서도 어울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마음은 가시방석이었다.
하나님 앞에서 해서는 안 될 일로 괴로워하면서도 직장의 선배들과 함께 자리하는 것이 점점 익숙해지고 있었다.
신앙과 세상을 오가며 괴로워하면서도 하나님과의 관계는 멀어지지 않기를 바랐다.
이번에 받게 될 채찍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일 것이라는 두려움이 가득했기에…

한편으로는 상당한 수입을 얻는 강사지만 다른 한편은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살아야 하는 마음의 부담을 갖고 몇 년이 지나면서 이제는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일단 이런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는 쪽으로 삶을 전환해야 한다는 마음에 학원에서 나와 개인 지도를 하기 시작했고, 결혼도 해서 안정된 삶을 갖고자 했다.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기쁘고 즐거울 수 없을까? 또 하나님을 섬기며 산다는 것이 부담이나 속박이 아니라 축복이라야 하는 것을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들이 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라고 할까?
그러나 교회를 가면 별로 기뻐할 것들이 없는 것 같고, 속박과 책임이 강요되는 것처럼 여겨졌다. (이것은 다 나의 신앙의 부족에서 온 것이다.)
이런 혼란 속에서 해결점을 찾지 못하고 지내고 있었는데, 어느 주일날 낮 예배를 마치고 오후 시간에 집에 머물면서 성경을 읽었다.
요한복음을 읽었는데, ‘참 빛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왔으나 자기 백성들이 영접하지 않았다. 그러나 영접하는 자 곧 그의 이름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 영접하는 것은 사람의 혈통이나 사람의 뜻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나는 것이다.’ (요1:11-13; 의역) 이 말씀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골똘하게 묵상하고 있었다.
‘하나님이 구원자를 이 땅에 보내셨지만 모두가 영접하지 않았다. 영접은 세상적인 방법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이다. 그것은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인데 속박이 아니라 특권을 얻게 되는 것이다. 축복이다!’ 이 말씀은 벼락처럼 내 심령에 내리꽂혔다.
나는 축복의 사람이었던 것을 저주받은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이제 나는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나님은 계신다.
하나님을 섬기면서 사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이다.
그렇다면 축복받은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는, 또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으면서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조건에 의해서가 아니라 본성적으로 그렇게 되어야 그 다음에 좋은 결과가 나타날 것이다.
이러한 마음의 전개가 지금까지의 나의 모든 생각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다.
고착화된 것들을 거꾸로 생각해야만 했다.
그래야 옳은 신앙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나름대로 정리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은혜 가운데 살며,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원한다면 먼저 관계정립이 중요한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즐거워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영화롭게 하지 않는다고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닌 것이 아니며, 내가 즐거워하지 않는다고 하나님은 불행해지시지 않는다.
다만 그런 믿음의 행위가 일어나지 않는 내가 즐겁게 신앙생활 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을 축복으로 여기지 않고 부담으로 여기는 것은 자신을 속박 받는 노예로 스스로 전락시켜버리는 것이다.
좀 우스운 말이지만 내가 하나님 앞에서 행복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즐거운 마음으로 섬겨야 한다고 나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지 않으면 신앙은 굴레가 되고, 책임과 부담만 되며, 잘못했을 때 징계가 따른다는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의 생각은 세상을 바꾼다.
더더욱 삶을 바꾼다.
은혜의 생각은 자신을 지옥에서 천국으로 이끈다.
그래서 믿음의 눈이 열려야 한다.

내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성경에도 그렇게 하라고 되어 있고, 또 그것이 나 자신을 영화의 자리로 나아가게 한다.
내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은 곧 나를 즐겁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즐거움과 영화는 하나님 안에서 얻게 되는 것이므로 최상의 것이다.
세상의 즐거움은 쓴맛을 남긴다.
세상의 영화는 몰락을 가져오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의 것들은 거룩하며, 영원하며, 바람직하며, 감동스러운 것이다.
신앙의 방황의 시발점인 ‘인간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하고,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신앙의 신조가 되었다.
이것에는 약간의 해석이 필요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내 신앙의 비결이 된 것이다.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시기를 원하신다.
그러면 가만히 있어도 다 은혜를 받는가?
은혜를 갈구하는 자에게 놀라운 은혜가 임할 것이다.
축복을 받고자 한다면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기뻐하라!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에 서서 그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라!
이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하나님께 마음이 닫힌 사람이 하나님의 햇살을 만끽할 수 있을까?
하나님을 기뻐하지도 영화롭게도 하지 않는데 은혜와 평강이 그 위에 쏟아져 내릴까?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면 당연히 하실 일이나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를 더욱 사랑하고 역사하시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