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7.09

왜 신앙을 갖는 것인가?

220709column_1000x727

우리는 왜 신앙을 갖는 것일까?
기독교인이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면 진정한 삶을 살 수 없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심지어 “진정한 삶을 살아서 뭐하지?”라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대체적으로 사람들은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좇아 산다.
그것도 주로 그 일들이 부여하는 유혹이나 하지 않으면 당하게 될 어려움을 두려워하면서 말이다.
말이 어려운가?
오늘 공부하지 않으면 내일 시험을 망치기 때문에라든가, 지금 일 안하면 봉급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등에 이끌려 살지, 내가 이렇게 살므로 기대하는 무엇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사는 경우는 드물다는 말이다.

분명히 우리는 인간으로 태어났을 때 나 자신만의 가치가 있고, 목적이 있다.
최소한 그것을 찾아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그런데 그것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노력이라는 지속성 속에서 사유하여 찾아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이렇게 사니까 나도 이렇게 살 수밖에 없지 않은가’가 우리의 보편적인 관념이다.
단지 삶의 수단으로서의 직업을 갖게 되는 것이 그런 경우이다.
난 어린 시절 ‘저 분은 왜 선생님이 됐을까?’ 하는 질문을 종종 마음으로 했던 것 같다.
선생님 아들로 자랐기 때문인지도 모르겠고, 신앙의 영향인지도 모르겠다.
어떤 경우 선생님이 학생들 앞에서 선생님답지 못한 행동을 스스럼없이 할 때 이런 반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학생들에게는 못하게 하면서 자신은 한다든지, 제자를 조금이라도 사랑의 눈으로 이해하면 좋을 텐데 분노의 사신이라도 된 양 화를 풀어낸다든지 하는 것은 그 행위 직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었다.

이런 사람들은 항상 있기 마련인데, 일본통치시기에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자식이나 권세를 팔아 자기 앞가림하기에 급급해 하던 사람들, 권력에 굴복하면서 자신은 군자인 체하던 위선적인 지식인들을 보면 그렇지 않은가?
성경이라는 지식을 몇 자 가지고 목사라고 하면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 더 심한 사람들은 성경 몇몇 구절을 양념처럼 사용하면서 축복이라는 단어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일로 자신의 입지를 세우는 알량한 목사들도 있다.
이런 것을 보면 참 한심하다는 생각을 넘어 비참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왜냐고? 나도 그런 사람처럼 여겨질까 겁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을 제거할 능력을 그 누구도 갖고 있지 않다.
이 사람들은 오히려 우리같이 어리석은 사람보다 훨씬 교활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잘도 훔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알맹이를 바로 가르쳐줘서 이들이 껍데기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의 관심이 떠나고 그들 자신만 남아 서성이다 소멸될 것이다.
내 눈에는 이 방법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어 보인다.

우리의 신앙의 문제는 근본적인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당면한 일의 앞가림으로부터 시작하고, 그것에 연연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오늘 내가 당하게 되는 어려움을 피하는 방법이 내 손에 쥐어진다 해도 과연 그것으로 해결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내가 바른 방법으로 가는 것인가를 검토해봐야 한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이다.’라거나 ‘잘만 되면 됐지.’라는 생각은 바로 우리를 부패하게 만든다.
금방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은 나 자신을 망치는 것이다.
왜 신앙인들이 자신들의 신앙에 대한 확신이 없을까?
왜 신앙인들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비난받는 일들을 할까?
다 이 문제에서 오는 것이라고 본다.
나 스스로 속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나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너 혼자 잘 믿고 살아라. 나는 네가 무슨 소리를 하더라도 축복받고 살면 된다.”고.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엉터리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하신다.
그러나 축복을 위한 하나님은 아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축복하기 위해 대기조로 서 계신 것도 아니다.
내가 빌면 하나님은 잔소리 없이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잘못된 신앙에 빠진 것이다.
하나님은 때로 자기가 사랑하는 자에게 고통을 더하기도 하시니까.
그러니까 고통이냐 형통이냐로 신앙은 판단하지 말 것.
형통 가운데 망하는 형통이 있고, 고통 가운데서도 정말 가치 있는 것도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바로 믿는다는 것에서 그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가치기준은 내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영혼에 있는 것이다.
허탕신앙은 사라져야 한다.
왜 그리 기독교 안에 무당들이 많은지…
당신이 그들의 수중에 있지 않은지 살펴보고, 그렇다면 빠져나와야 한다.
신앙이란 내가 하나님을 위한 것인지, 하나님이 나를 위한 것인지, 하나님은 나를 위하고 나는 하나님을 위한 것인지 신중하게 물어보라.
이것에 대한 명료한 해답을 찾아내지 못하면 당신의 신앙은 다시 정립해야 된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을 죽일 수 없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