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4.22

없는 것을 감사해 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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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3학년 이맘 때, 따뜻한 어느 봄날이었다.
지난겨울에 다사다난한 시간들을 보내왔기 때문에 아무런 생각 없이 그냥 수업시간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지난 해 가을인가 전학을 왔던 것 같고, 겨울에 집에 불이 나서 집기들을 하나도 건지지 못하고 다 태워버렸다.
다른 집에서 시작된 불로 한 지붕 아래 다가구 주택이 몽땅 타버린 것이다.
우리나라가 북한의 공격을 받아 후퇴한 날과 겹치기 때문에 뚜렷이 기억한다. 1월 4일.
그 뒤 우리 가정은 얼마 동안 그야말로 이재민으로 살았다.
아마 아버지가 학교교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거지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정신없이 새 학년을 맞았고, 폭격당한 마음으로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지금부터다.
쉬는 시간 운동장으로 나간 반 여자아이가 수업 시작종이 울렸는데도 돌아오지 않았다.
선생님은 같이 있었던 사람이 없는지 확인하기에 정신이 없었다.
참, 내가 다닌 학교 이름은 ‘부민초등학교’, 부민동에 있다는 뜻이다.
‘부민’이란 ‘부자’할 때 ‘부(富)’이고, ‘민(民)’은 다 알겠지만 ‘사람들’이란 뜻이다.
그래서 부자들이 사는 동네이고 부자의 자식들이 다니는 초등학교인 셈이다.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정말 내가 사는 동네는 부자들이 많이 살았다.
도청, 대통령관사, 도지사 관사, 법원 등이 모여 있는 곳이었고, 그 주변에 있는 집들은 다 부잣집들이었다.
학교를 갈 때 아스팔트 위를 걷는 기분이 좋았는데, 오른편은 도청이고 왼편은 부잣집들이 나란히 들어서 있었다.
그러나 내가 살았던 구역은 부자동네가 아니었다.
그것이 확실한 것은 우리 집이 부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난민촌과 같았다.

다음 수업시간이 돼서야 여자아이가 돌아왔다.
속옷만 달랑 입고 나타난 것이다.
울고 서 있는데 어떤 사람이 학교까지 데려다 주었다는 것이다.
우리 반이 웃음바다가 되었어야 할 것 같은데 한 사람도 웃지 않고 충격을 받아 쳐다보고 있었다.
선생님이 부랴부랴 여자 아이들에게 말해 대충 그 아이에게 겉옷을 입혔다.
그 다음은 생각이 안 난다.
그렇지만 그때 선생님이 하신 말씀은 기억난다.
“얘가 사탕 준다고 하는 어른을 따라갔다. 유괴를 당한 거지. 옷을 홀랑 뺐기고 돌아온 것이다. 누가 뭘 준다고 해도 따라가지 마라. 학교 올 때 좋은 옷 입고 오지 마라.”
난 그때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에 빠져들었다.
우선, 내 옷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
집을 홀랑 태웠기 때문에 내 행색은 말이 아니었다.
나도 반 친구들 가운데 부잣집아이들처럼 입지는 못해도 부끄럽지 않은 옷을 입고 싶었는데, 선생님은 좋은 옷을 입고 오지 말라고 했고, 좋은 옷을 입은 아이는 유괴되어 옷을 뺏겨버렸다(?)는 생각이 미치자, 나는 감사했다.
유괴 당할 일이 없을 거니까!
그래도 그럴만한 돈이 없는 것은 서러운 일이 아닐까? 혼란스러웠다.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지만, 불난 집을 보고 있던 거지 부자(父子)가 있었는데, 아들이 아버지에게 “아빠, 우리를 불탈 것이 없어 좋지?” “그거 다 애비 덕인 줄 알아라.” 그런 심정이 오락가락했다.
또 만약 내가 유괴되면(그럴 리가!) 어떻게 대응하고 도망칠 것인지를 놓고 고민하고 있었다.
그래도 혹시 아는가, 그런 일이 벌어질지.
아무리 고민을 해도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내 일상행동을 고려해보면 말을 더듬거리다 도망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외에 달리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생각이란 늘 그렇듯이 한참 열을 올리다가 슬며시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그때에 한 가지는 배운 것 같다. 없는 것이 감사할 때도 있구나! 하는 것이다.

우리는 깔려 죽더라도 돈이 많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실제 그런 일이 일어나면 회개하면서 하나님께 한 번만 살려달라고 부르짖을 것이다.
내 가까운 사람이 나에게 던져준 인상적인 말,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
이 말을 들었을 때 기분이 상했다.
우리 집안에서 귀신이라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고, 죽은 자의 시체에 대한 모습을 다루는 말도 들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마 먹고 죽은 사람의 시체는 굶어죽은 사람의 시체보다 겉보기가 낫다는 말이겠지?
그러나 죽으면 다 똑같다.
어쩌면, 먹고 죽은 시체는 관 값이 더 들 수도 있다.
어쨌든 먹고 봐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우리는 먹어야 사는 것은 사실인데 이상하게 난 이 소리가 거북하다.
아무리 잘 먹어도, 먹기만 하다가 죽는 것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다.
보람 있게 살다가 피골상접해서 죽는 것이 더 낫다고 믿고 있다.
부포자냐고? 아니, 난 부자 돼서 뭐하냐고 묻고 싶다.
이 말은 부자가 되고 안 되고가 아니라, 얼마나 가치 있는 삶을 사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부자 되기를 포기한 사람이라고 해도 괜찮다.
여행자에게는 무거운 짐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고, 전쟁이 일어나 파괴된 집은 규모가 클수록 속상할 것이다.
이 일로 어리고 부족했지만 없는 것도 감사하다는 생각을 잠깐 했었는데, 지금 와서는 없는 것을 감사할 줄 아는 성숙한 인격체를 가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새삼 깨닫는다.
당신의 신앙이 하나님을 향한 것이 아니라 부와 형통을 향한 것이 아닌지 확인해 보라.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6:68)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이 두 구절을 누구나 알겠지만 진정으로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이 글을 읽는 사람들 모두가 진정한 신앙에 들어오기를 기도한다. 나 자신을 포함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