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1.21

생각의 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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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딸이 초등학교 3학년 때 엄마 따라 시장 갔다 돌아와서 말했다.
“아빠, 가게 사람이 엄마를 어떻게 알아봤는지 ‘사모님’이라고 불렀어요!” 신기했다는 눈빛이었다.
그 말을 들은 내가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희한하게 날 어떻게 알아보는지 가는 곳마다 ‘사장님’이라고 불러.”
딸은 이상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하도 오래된 일이라 어떻게 정리됐는지 모르겠다.

나는 한 이발사에게 30여년을 머리를 깎고 있다.
이발사가 사업처를 옮길 때마다 따라간 셈이다.
존경하는 의미로 그분을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그러다 20여년이 지난 어느 날 ‘사장님’이라고 부르니까 너무 좋아하는 것이었다.
나는 알듯 말듯 이상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선생님이라는 말이 훨씬 존댓말인데?”

언젠가 어디를 가서 아내를 기다리다가 조그만 가게에 들러 상품들을 구경하고 있는데 여주인이 카운트에 앉아 내게 말을 걸었다.
“어떤 종류를 좋아하세요?”
딱히 할 말이 없어 “구경을 좀 하고요.”
그러다가 내가 그 여주인을 ‘아주머니’라고 불렀던 모양이다.
아마 가게도 조그마하고 그렇게 말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서 나도 모르게 그렇게 부른 모양이었다.
내게 익숙한 것은? “집사님!”
그런데 여주인은 그렇게 부르지 말아달라고 했다.
“어떻게 부를까요?”
“사장님이라고 불러주세요.”
“아, 그래요??”
맞다. 사장님은 사장님이다.
그런데 내가 그분에게 사장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이상하고 멋쩍은 일로 여겨지는 것은 나의 잘못된 사고방식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때 사람들은 자기를 사장님이라 불러주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다음부터는 웬만하면 다 사장님으로 부른다.
과장님도 사장님으로 불러주면 좋아한다니까!
우리 교회 집사님에게 사장님이라 부르면 좋아하려나?

내가 다니는 안경점도 한 30년이 되었는데, 이곳저곳 다니는 것이 싫고, 다른 곳을 찾는 것도 번거롭고,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수리를 해야 하니까 한 안경점만 고수하고 있다.
그곳에서 나를 부를 때 ‘사장님’과 ‘회장님’을 정신산란하게 혼동해서 부른다.
어떤 때는 1분 사이에 두 명칭이 오가면 부르면 나도 모르게 혼란스럽다.
그러려니 하고 생각은 하지만 “참 애쓴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내가 호칭을 바로 잡아 줄 수도 없고, 하나로 고정해서 부르라고 할 수도 없는 처지이다.

하루는 기차역에 갔을 때인데 아내와 함께 어떤 분을 배웅하고 역 광장을 가로질러 오고 있었다.
한 할머니가 다가와서, 자기 집이 경북인데 기차 요금이 없어 지금 가지 못하고 있다고 하소연하면서 3000원만 있으면 된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선뜻 내어주었다.
예수님께서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고, 가난한 자에게 물 한 그릇을 주면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고 하셨으므로…
그리고 우리 부부는 이야기를 나누며 광장을 빠져나와 버스를 타기 위해 길로 들어섰을 때 또 한 할머니가 다가와 자기 집이 경북인데 기차요금이 없어 못가고 있는데 3000원만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순간 “왜 이렇게 돈 없이 집에 못 가는 사람이 많지?”
“왜 다 경북 사람들이지?”
“왜 할머니들이??”
이 생각을 떠올리고 있을 때 아내가 외쳤다.
“이 할머니 아까 그 할머니 아니에요? 이 할머니 돈 뜯어내는 사람이네!”
그 말을 듣고서야 정신이 돌아왔다.
그 순간 할머니는 순식간에 우리 뒤로 사라졌다.
내가 본 할머니 중 가장 날쌘 사람이었다.
가서 도로 받아내기는 인심 날까 봐 관뒀다.
내가 멍청한 것인지, 착한 것인지, 아내가 눈치가 빠른 사람인지, 현실적인 사람인지, 세상이 이상하게 돌아가는지, 할머니도 앵벌이가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 사람을 만나러 어느 곳으로 갔다.
그곳에는 여러 사람들이 서 있었다.
나는 도착해서 만날 사람을 그 안에서 찾고 있는데 어떤 여자가 내게 다가와 오랜만이라고 하면서 반갑다고 내 손을 잡고 얼마나 기뻐하는지…
사실 내가 만나고자 하는 사람은 목사님이었고 남자인 것으로 알고 있었다.
순간 혼란에 빠졌다.
‘그 목사님이 급한 일이 있어 이 분을 대신 보냈나?’ 아니면 ‘이 분이 나를 아는데 오랜만에 우연히 만나서 반갑게 인사를 하는가?’ 가늠할 수 없었다.
나는 미소를 띠고 어정쩡한 태도로 여자 분이 손을 놓아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목사가 되면 오해 살까봐 염려하는 습관이 든다.
그래서 “어떻게 되세요?” 하고 물었다.
“너 누구 아니야?” “나 몰라?”를 연발하더니 “아닌데요.” 말하니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이상하게 키가 크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자기도 민망한지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 뒤의 일은 생각도 안 난다.

어떤 학생이 미국 유학을 가기 위해 입학지원서를 정성껏 작성해서 보냈다.
다른 친구들은 다 장학금을 받고 유학이 허락되었는데, 자신은 입학허락은 받았으나 장학금을 받는 데는 탈락했다.
몹시 서운했다.
그 밑에 탈락 사유가 기록되어 있었다.
“본교에서는 가난한 학생에게 장학금 혜택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귀하는 부유한 가정에 살고 있으므로 제외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그 학생은 어리둥절했다.
‘미국에 있는 그 학교가 내가 부유한지 가난한지 어떻게 알지? 왜 내가 부유하다고 단정하지?’
자기를 가난하지 않다고 평가하는 것이 그렇게 억울한 모양이다.
그 학생은 실망해서 어떻게 할까 하고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자비로 유학을 간다는 것은 자신에게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궁금해서 다시 자신이 낸 서류와 학교당국에서 보낸 답장을 찬찬히 재확인해봤다.
그리고 문제점을 발견했다.
자기가 보낸 주소에 ‘00캐슬 000-000’이 문제였던 것이다.
미국학교당국은 이 학생이 엄청난 부자라 캐슬에 살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내용은 어느 책에서 본 것이다.

생각이란 누구나 할 수 있고, 자신이 어떻게 할 것인가를 결정한다.
그러나 착각도 오류도 많고, 때로는 돌이킬 수 없을 때도 있고, 타인이 오해하기도 한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바를까? 또 바르게 이해하고 있고 바르게 말할까?
어쩌면 자기방식대로 생각하고, 그것을 믿고, 그것을 전하고, 그것을 손에 쥐었다 놓았다를 반복하면서 살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우리가 세상에서 그러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