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5.07

나의 왼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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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나의 왼발”이란 영화를 본 적이 있다.
가난하지만 활기 넘치는 가정에 뇌성마비 아이가 태어났다.
순간 온 집안은 우울해진다.
아이의 아버지는 더 심했다.
매일 술에 취해서 집에 돌아왔다.
아이는 정신만은 정상이었지만 말도 할 수 없고, 온몸이 뒤틀린 불구였다.
그래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왼발인데,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자라면서 형제들이 수레에 태워 바깥 구경을 시켜줘야 했고, 식사할 때도 침이 질질 흘러나오는 입에 누군가가 음식을 넣어줘야 했다.
동네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었지만 밝은 성격의 형제들과는 곧잘 어울렸다.
엄마는 꿋꿋했다.
그 아들에게 소일거리라도 하라고 물감을 사다 줬는데 붓을 왼쪽 발가락에 간신히 끼워 그림을 그렸다.
선은 제대로 그릴 수 없고 거의 점, 혹은 스쳐 지나간 붓 자국과 같은 터치로 그림을 그렸다.
하나의 그림을 그리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는지 몰랐다.
어쨌든 그가 그린 그림이 어느 여 심리학자의 눈에 띄었고, 그 학자는 아이를 돕겠다고 자청하여 나섰다.
그녀는 왼발의 청소년을 이해하고 정성껏 도왔다.
그를 돕는 데는 이해심과 동정심 그리고 특별한 점을 관찰하여 발견하는 것, 그 이상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이는 선생님을 사랑하게 된다.
그녀에게 잘 보이기 위해 얼마나 피나는 노력으로 그림을 그리는지 놀라움 그 자체였다.
그뿐만 아니라 ‘아’ 소리도 내기 힘든 아이가 책을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어눌하지만 말까지 하게 되었다.
선생님과 격을 맞추기 위한 노력이었다. 사랑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그러나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자살을 기도한다.
면도날로 자신을 자해했으나, 어머니에게 발각이 되어 살아난다.
마음속에는 배신감과 복수심, 증오심이 가득했고, 또 한편으로는 자신의 처지를 생각해 체념하려고 무척 노력한다.
이것들이 쉽게 정리되지 않고 그의 뇌리에서 복잡하게 돌아다녔다.
자서전을 쓰게 되었는데 책의 제목이 “나의 왼발”이고 그 안에 삽화들이 담겼는데 자신이 발로 그린 그림들이었다.
그래도 자기를 도와준 여 선생님은 그를 완전히 떠나지 않고 애정으로 그를 가끔씩 보살펴 왔다.
그 선생님의 주선으로 책이 나오게 되고 출판 기념식을 갖게 된 것이다.
출판 기념식이 열리는 그곳에서 잠깐 자기를 돌보는 아가씨에게 사랑 고백을 하고 사랑하게 되어 결혼에 골인하는 것이 그 영화 내용이다.

나는 이런 고난과 시련에서 이겨낸 사람들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그것과는 반대로 고난을 당하거나 특히 병에 걸려 힘들어 하는 것을 보는 것은 싫어한다.
그러니 이 왼발의 사나이를 보면서 감탄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내가 그 사람의 입장이 되었으면 가능이나 했을까?
나의 어린 시절에 대한 추억의 첫 번째 장면은 어머니의 손을 잡고 병원에 간 일이다.
그나마 명확하게 뇌리 속에 남아 있는 기억의 조각은 병원에 들어가는 것, 내가 아프다는 것, 병원에 들어섰을 때 크레졸 냄새가 진동했다는 것이다.
“엄마, 병원이 싫어!” 했던 기억이 나고, 어머니는 “치료해야 낫지.”라고 말씀하셨다.
길거리를 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생생하게 걸어 다닌다.
그러나 병원에 가면 세상 사람이 다 환자들이고 거기에 모인 것 같다.
병원 가까이 가지 않으면 아프지 않거나, 병원을 없애면 죽지 않거나, 이런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병원은 없으면 안 된다.
평소에는 무심하다가 몸이 아프면 병원을 사모하게 된다.
병원에 입원하면 의사들이 달려오고 이 의사, 저 의사가 번갈아가면서 진찰하고 돌본다.
그것을 생각하면 내가 대단한 것이 아니라 내 병이 대단한 힘을 가진 것처럼 생각이 들고, 내가 그분들을 괴롭히는 것 같아 미안해지기도 한다.

하도 병원신세를 많이 졌고,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진단까지 받아본 나이므로 왼발 사나이를 보면서 그의 의지가 얼마나 대단한지 새삼 느낀다.
그에 비해 그렇지 않은, 건강한 몸을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의지가 약한지도 깨닫게 된다.
어쩌면 시련이 사람을 만든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에게 시련을 주면 모두가 다 시련을 딛고 일어서는 의지를 보이는가?
그렇지도 않다.
그래서 시련을 극복하거나 시련 가운데서도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단한 것이다.
‘용감’과 ‘취약’은 다른 것인가? 취약함이 없을 때 우리는 용감하다거나 용기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용감한 자들이 두려움이나 장애가 없거나 제약을 받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들도 취약함에 대해 누구보다 잘 느낀다.
취약함이 없어야 용감해지는 것이 아니라 취약함을 이기고 행동하는 사람이 용감한 것이다.
심지어 수치심도 부담감도 이겨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할 때 이런 취약함을 없애달라고 기도하는데,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자기 사람들을 취약함을 통해 훈련시키는 것을 많이 본다.
나는 나름대로 긴 세월 동안 다윗이라는 인물을 묵상해 왔다.
다윗은 용감함의 대명사이다.
그러나 그를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에게도 취약함이 널려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윗이 골리앗을 치는 장면을 놓고 내가 어린 시절 고민했던 것은 ‘정말 다윗이 겁 없이 골리앗과 싸웠을까?’ 하는 것이었다.
‘난 다윗처럼 할 수 없을 거야. 나는 겁이 많으니까.’ 아마 나를 아는 사람은 이 부분에서 웃음을 터트릴 것이다.
그러나 정말 겁이 많았고, 겁이 지금도 없는 것은 아니다. 솔직히 많다.
단지 겁에 질려서 아무것도 못하는 것은 더 괴로운 일이라는 것을 알 뿐이다.
우리가 종종 기도할 때 이런 우를 범하지 않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기도는 도피용이나 회피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내가 기도하고, 하나님이 내 기도한 것들을 들어주실 것이다.
하나님은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반석이시다.
그런데 우리는 틀렸다.
하나님이 우리의 피난처라고 할 때 이 피난처는 유형이 아니라 무형을 말한다.
결국은 피해서 숨어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피난처 자체시니까 그를 믿고 오늘의 취약함을 극복해야 하는 것이다.
굳건한 의지로 인생을 일으킬 수 있다.
그렇다면 굳건한 자신의 의지로 해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필요 없는 것일까?
하나님을 뺀 자리는 악만 남을 것이다.
다윗이 다윗 된 것은 그가 기도만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기도하고 나가 전쟁을 한 것이며,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자신을 던졌던 것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당신은 왼발의 사나이가 아니라 사지가 멀쩡하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