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떤 사람이 전쟁에서 팔다리를 잃은 사람을 위해 기도했을 때 팔다리가 다시 생기지 않으며, 전쟁에 참전한 사람들을 위한 기도가 응답되는 것을 보았느냐면서 하나님을 부정하는 데 열을 올리는 것을 책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나요?
정말이지 없어진 팔다리가 기도해서 다시 생기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성경에도 장님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것을 봤지 팔다리를 잃은 사람에게 새로 생겼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기도란 엉터리고,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으며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까요?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망원경으로 우주의 수많은 별들이 찍히고 그 별들 가운데는 다양한 모양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면 이런 것들을 창조했다는 하나님이 허상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을까? ‘저렇게 많은 행성과 항성들을 어떻게 창조할 수 있을까하는 의심에서일까?’
다시 돌아와 왜 하나님이 계시다면 팔이 없어진 자에게 팔이 다시 생기게 하지 않으시는가? 왜 하나님은 우리가 정말 필요로 할 때 기도에 응답하지 않는 것 같은가? 믿지 않는 사람들이 믿을 수 있는 증거를 말해보라고 다그칠 때 우리는 그것에 대해 명확한 답변을 할 수 없는가? 왜 과학적인 무엇이 발견될 때마다 기독교에 대해 공격하는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가?
우주나 우주의 법칙들이 발견되는 것과 하나님이 없다는 것과는 상관이 있는가요? 이것을 논하자면 중세로 가서 가톨릭이 과학자들을 압박하고 그들에게 징벌을 준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근본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창조’와 ‘우연히 빅뱅을 통해 생겨난 우주’라는 것의 대립적 시각 때문이기도 하겠죠. 이후가 있으면 이전이 있을 것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우주가 빅뱅으로 일어났으면 처음 공간은 어떻게 해서 생긴 것인가? 이런 식으로라면 끝없는 질문과 논쟁으로 이어지겠죠. 과학이란 자연과학을 말하는 것인데 과학은 정신을 해석해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그것에 우리는 숭배자가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갖는 믿음을 과학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정죄하거나 비판하는 것은 온당치 못한 태도입니다. 그 자신이 과학을 통해서 볼 때 믿어지지 않으면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과학 그 너머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믿고 의지합니다. 그것이 비판받을 일은 아니겠지요?
하나님은 우리의 질문에 대해 일일이 답해야 하는 의무를 가졌거나 그래야만 증명이 되어져 믿어지는 대상이 아닙니다. 성경에도 하나님은 창조주요 주권자라고 기록하고 있지 어떻게 즉 우리가 상상 가능한 방법으로 창조한 것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우리와 교감하며 대화를 하십니다. 그러나 때로는 침묵하십니다. 침묵은 침묵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또 하나의 언어이고 방식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오 엑스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이루고, 우리를 궁극적으로 그 자리로 이끌며, 결국은 천국에 다다르게 하는 것입니다.
아마 하나님은 우리에게 앉은뱅이나 장님은 눈뜨게 하고, 문둥병자는 낫게 하시겠지만 없어진 팔다리를 다시 생기게 하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병이 낫는 것은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이 땅에서의 치유는 천국을 기대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없어진 팔이 생기는 것은 보지 못하던 장님이 눈을 뜨는 것과는 다를 수 있으며, 하나님의 역사의 목적은 이 땅에서만의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만약 모든 기도에 그대로 응답한다면 하나님은 믿지 않으면 안 되는 대상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적 믿음으로 사실이 되어버리고, 우리의 믿음이란 의미가 없어지게 됩니다. 다음에는 상당한 사고들이 의도적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죠. 어차피 없어진 것도 기도하면 있게 될 것이고, 아무리 자르고 상하게 해도 기도하면 하나님이 다시 생기게 하실 것이니까요. 하나님은 인간으로부터 놀림을 당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은혜 안으로 들어올 수 없으며, 믿음은 특별한 은혜로 이루어진 축복이라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간혹 사람들은 과학은 신앙의 반대라고 무조건 단정하는 경향이 있는 것을 봅니다. 과학이 그렇듯이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자유이고, 우리가 갖는 권리입니다. 남의 그런 자유와 권리를 정죄하듯 하는 것은 예의에 벗어난 일이라고 봅니다. 최고의 과학자가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요? 그런 사람은 과학자가 아니라고 선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실제로 저명한 과학자 중에 신앙이 깊은 사람들도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미국의 한 고등학교에 갑자기 총기를 든 남자가 침입해서 아무 이유 없이 다니면서 난사했습니다. 학생들은 공포에 떨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아이들은 하나님께 이 일을 막아달라고 기도했으나 괴한이 쏜 총알에 맞고 쓰러졌습니다. 과연 하나님은 있는가? 하고 질문하고 거기에 대한 납득할 만한 대답이 없다고 하나님이 안 계신다고 못 박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설명하기는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위기에서의 응답이 내 뜻하는 대로 주어지지 않는다고 하나님이 없다고 단정하는 것은 경망스런 일이 아닐까요? 간절히 바라는 다급한 기도에 원하는 대로 응답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다소 섭섭하고 아쉬운 일이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그 뜻을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인의 참 모습이 아닐까요? 이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태도이고, 하나님의 뜻은 이 땅에서만 아니라 저 하늘에서도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믿음은 하나님은 전능하셔서 무슨 일이든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주권자이시므로 그의 온전하신 뜻으로 행하십니다. 단지 이것을 보거나 경험하게 되는 우리 자신으로서는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내가 신앙의 주체가 아니므로 주체이신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겸손과 수용 그리고 신뢰와 동행, 경배의 자세가 요구됩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거래상대가 되고, 평행선에서 질문을 던진다면 하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는 부모의 하는 행동에 대해 부모님의 마음을 알 수 없으므로 때로는 오해를 하기도 하고,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을 겪기도 합니다. 지나고 나서 봤을 때, 또 과거에 왜 그랬는지를 듣게 되고 “아하”하고 이해합니다. 신앙이란 이렇게 될 것이라는 것을 지금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왜 그렇게 되지?” “뭐야?” 때문에 신앙이 좌절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 따르는 성숙한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없어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없다고 단정해서도 안 됩니다. 실패는 자신이 인정할 때 실패가 되는 것처럼 불신도 자신이 믿지 못할 때 불신이 됩니다. 하나님은 왜 9.11테러를 허락하셨을까? 그것은 이슬람을 높이기 위함도 아니고, 미국을 심판함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일어난 일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 아픔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이끄시고자 하는 뜻을 찾아 따르게 하기 위함이라고 아픔을 허락을 하셨으리라 봅니다. 믿음에 흔들리지 말고 믿음으로 굳게 서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회의는 하나님을 내 수준에 두고 벌리는 일이니까요. 하나님을 신뢰하면 당신은 혼란에서 벗어나 희망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실 것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