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2.08

행복을 말해야 할 계절

angel

국내뿐 아니라 세계가 폭탄을 맞은 듯 뒤숭숭합니다.

국내는 신뢰와 배신을 외치던 대통령이 배신을 당했는지, 그것을 이용했는지 아직 밝혀지지 않은 가운데 국민은 분노와 우울감에 젖어 있고, 미국은 예상치 못한 사람이 대통령에 당선되어 온 세계를 당혹감에 빠트렸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 과연 끝까지 잘 그 직무를 수행할 수 있을까? 국가는 지도자 한 사람이 모든 것을 다 운영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한 사람의 영향력이란 너무나 크기 때문에 이렇게 충격에 빠지고 염려하는 것입니다.

단지 한국과 미국만의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중동의 나라들과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나라들에서는 끊임없이 분쟁이 일어나고, 탄핵, 전직 대통령 투옥, 내전, 계층 간의 갈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문득 “세상이 왜 이렇게 됐을까?”하는 생각이 자주 머리에 스칩니다. “혹 세계대전과 같은 전쟁이 없으니까 국가 내부에서 온갖 갈등이 일어나는 것이 아닐까?” “모범적인 삶은 나만 손해야(?)라고 온 세계가 새 유행을 타고 있는 것일까?” “이 세상이 종말로 치닫고 있을까?” “왜 사람들은 금방이라도 드러날 일을 정신없이 해대는 것일까?” “도대체 세상의 권력이란 무엇일까?” “앞날이 어떻게 될까?”…….

어쩌면 또 다른 생각들을 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이야 어떻게 돌아가든 나 먹고살기가 바쁘다”는 무관심과 욕망 이기주의에 빠질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지금 당장 나 먹고살기와는 상관이 없어 보이지만 곧 영향이 쓰나미처럼 밀려 올 것입니다. 최악의 삶을 살고 있다고 판단하는 사람에게는 별 영향이 없을 수 있고, 오히려 이런 기회에 더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하게 합니다. 그렇게 될 때 나라들은 도산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역사를 통해서 드러난 것이니까요. 또 한편 생각해보면, 세계대전으로 지구가 몸살을 앓고 나서는 함께 좋은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생각이 주된 사고로 자리 잡았지만, 이제 세계대전이 끝난 지 50년이 넘었고, 경제적으로 발전하고 개인이 질적인 삶을 추구하다 보니 다시 국가, 지역, 개인 이기주의로 회귀하는 성향이 나타나는데 이전처럼 국가주의라기보다 기존질서를 무너뜨리고 싶은 개인적인 욕망의 분출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성향들이 함께 뭉치기도 하고요.

“왜 이렇게 됐지? 인간은 원래 그런 것인가?”

분명히 현대문명이 가져다준 결과일 것입니다. 지금은 인터넷 시대, 근본적인 윤리가 무엇인지도 허물어져 가고, 사실보다 소문이 더 무성하고, 그 무성한 소문이 하나의 힘을 갖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그런 악성 루머 때문에 엄청난 피해를 보고, 또 어떤 사람은 그것으로 자기 이름을 날리기도 합니다. 인간이 기계를 만들었지만, 기계 속에 인간이 조종되는 듯한 느낌을 받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습니다. ‘인공지능에 대해 윤리부터 만들자’라는 말들을 하지만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요? 악한 사람들은 그 기술들을 계속 개발하고 자기의 욕망을 이루는 수단으로 사용할 것이고(그런 행위를 자랑까지 할 것입니다. 남이 못하는 것을 하는 것은 선과 악을 떠나 우월함이 되니까요.), 선한 사람들은 억제를 하면서 좋은 곳에 사용하려 했을 때 결국 모든 것은 악한 자의 손에 의해 장악되지 않을까요? 그 전초전으로 “누가 해도 마찬가지야! 다 갈아 치워버려! 지금까지 해 먹은 자들을 믿을 수가 없어! 일단 엎고 보자고!” 이렇게 해서 일들이 벌어지고, 그다음에는 건전한 대책이 없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예수님은 “너희가 비둘기같이 순결하고 뱀같이 지혜로워라.” 말씀하셨는데, 오늘 우리에게 세상을 보고, 대처하는 법을 가르쳐 준 것 같습니다. 세상이 요지경처럼 돌아갈 때 그것을 지혜롭게 바라보고 대처해야 한다는 것과 동시에 우리 자신은 중심을 잡고 거룩해야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논리는 비둘기 같으면 어리석고, 뱀 같으면 사악입니다. 그런데 세상을 살아가거나 성공하기 위해서는 뱀을 택하는 것이 옳다고 보는 것이 보편적인 관념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사실은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에 동감할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 실천하는가 하는 문제는 또 다른 차원의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중심으로 우리가 한데 뭉쳐 조화를 이루어야 할까요?

이 땅에는 이미 거의 모든 도덕적인 표현들이 다 나왔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결국 내 마음에 거룩하신 하나님을 모시고 있느냐 아니냐의 두 가지만 존재한다고 봐야겠지요?

지금은 하나님을 모셔도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대로의 하나님을 모시기보다는 우리 정욕과 바람이라는 그릇에 하나님을 넣어 해석하고 자기가 바라는 만큼 하나님을 섬긴다고 합니다. 이런 것은 바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섬기는 것입니다. 한 가정에 엄격하고 존경스러운 아버지가 있다고 한다면 그 가정의 자녀들은 모든 일에서 아버지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앙이란 바로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나에게 의식주를 제공하는 자가 아버지, 내가 원하는 것을 손에 넣게 해주는 자가 아버지로 이해될 때 그 가정은 온전할 수 없습니다.

 

한해 마지막, 크리스마스와 연말입니다.

어쨌든 한 해는 지나갑니다.

나는 목사로서 기도합니다.

그래도 이때만큼은

우리 모든 백성이 무조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이 땅에 구원자로 보낼 때

어떤 계층이나 민족, 각자의 선과 악을 따져서 구원하려 보낸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 각자는 경중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치명적인 죄인입니다.

스스로 구원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보내 구원하시는 것이고,

그것은 ‘누구든지’이지만 ‘무조건’은 아닌 것은,

그를 모시지도 않는데 어떻게 구원하겠습니까?

 

모두가 하나님 앞으로, 즉

이 땅에 오신 예수를 믿음의 주로 모심으로

모든 해결의 시발점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함께 하길!

하나님이 붙드시는 은혜의 손길이 임하길!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기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길!

성탄의 축복이 모두에게!

당신과 당신의 가정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