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11

욥의 고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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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를 읽어봤는가?
매주 수요일마다 욥기를 강해해왔는데 지난 주 마지막 장에 도착했다.
아마 2년은 더 걸린 것 같다.
마지막 장이니까 결론 부분이다.
우리는 ‘고난’ 하면 ‘욥’을 떠올리고, ‘욥’ 하면 ‘고난’을 떠올린다.
그러나 어떤 고난을 어떻게 받았으며 그 고난의 기나긴 여정을 어떻게 버티고 극복했는지는 잘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다.
고통은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이며, 혹여나 감염이 될까 두려운 것이다.
욥기를 통해 욥의 고통의 과정을 알지 못 하는 자가 욥기의 마지막에 관심을 갖는 것은 “어떻게 하면 축복을 받을 것인가?”에만 관심을 두는 것과 같은 것이다.

언제부턴가 한국교회는 ‘고난’을 ‘축복을 받지 못한 자들의 것’이라 거나 ‘죄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정죄성의 감정을 갖기 시작했다.
이 연유는 내가 아는 한 이렇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와 고난을 다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으셨으므로 그를 믿는 사람은 그 안에서 그의 대속으로 자유와 축복을 누리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말대로 당신이 믿고 있다면 당신은 종교사기를 당한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예수를 믿는데도 아직 고난 가운데 있다는 것은 믿음이 없다는, 아니면 하나님이 당신에게 예수님을 안 주셨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믿음이 없다는 뜻이다.
이 논리에 스스로 적절한 답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이 질문은 어떤가?
바울은 예수님 십자가 이후의 사람이며, 사도이다.
그런데 그는 (고후11장)에 자기가 당한 엄청난 고난들을 열거한다.
그렇다면 그에게는 십자가의 보혈이 흐르지 않는다는 말인가?
그 사람은 초대교회 인사라서 그렇고 오순절운동 이전이니까 그런가?
세상에 그런 엉터리 같은 억지는 없을 것이다.
나는 젊은 시절 연륜이 있으신 목사님들이 여기에 문제제기 하지 않는 것에 속상해했다.
그러다 나 스스로 정리한 것이 “나 하나라도 잘하자.”였다.
답답하지만 어쩌면 신비주의에 대한 냉소적인 태도 정도에만 서서 괴로워해야만 했다.
이상하게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믿는 진리가 옳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거의 모두가 거기에 홀려 있는데 혼자서 그 말을 외치려면 광야로 나가든지 돌에 부딪혀 죽든지 해야 했다.

예수님도, 사도들도, 심지어 초대교회 성도들도 엄청난 시련을 당했다.
기독교 신앙은 곧 시련이었다.
그럼에도 성도들이 예수님을 믿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이 보내신 유일한 구원자이며(이것은 구약을 통해서보나 실제 신약의 사건과 연이은 그를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일어난 일들을 보면 부인할 그 어떤 자료를 찾을 수 없다.), 그를 믿고 증거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최고 가치 있는 일 즉 영광이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신앙의 포커스는 축복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키고 싶다.
그런데 인간의 욕망은 내세보다 현세에 눈이 사로잡혀 있고, 눈에 다가오는 것들은 우리의 마음을 자극하고 점령한다.
거짓선생들은 그 욕망을 노린 것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신앙의 목적이 바뀌어 버렸다.
하나님을 믿는다가 아니라 축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다!
아마 이 글을 읽는 사람 가운데 이런 반응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게 그거 아냐?”
어떻게 그게 그것인지 살펴보라.
이것들이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이미 당신의 영혼은 기복에 잠식된 것이지 진정한 신앙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 바란다.

욥은 한 순간 치명적인 시련에 봉착한다.
가정도 잃고, 자식들도 모두 죽었다.
재산도 전부 약탈당했다.
아내로부터 “믿는다더니 꼴좋다. 혼자 실컷 믿고 죽어라.”고 저주를 받았고, 자신의 몸에도 병이 걸려서 하루아침에 고통에 비명 지르는 환자요, 거지가 된 것이다.
지금까지 거룩한 족장이었고 모든 사람들이 찾아와 인사를 드리고 욥 주변에 있으므로 위안과 영광을 얻고자 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모두가 그를 외면했고, 저주받은 자와 함께하면 저주가 옮을지도 모르고, 또 즐거움을 원하며 사는데 저주받은 자를 가까이 한다는 것은 스스로 추구하는 삶을 싫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욥은 어느 사람과 다르지 않았다.
재 가운데 앉아서 슬픔의 곡을 하게 되었다.
몸은 욕창이 생겨 기왓장으로 긁었다.
하루 이틀이 아니라 이것이 계속되니 동네 어린 아이들도 욥을 깔보고 놀렸다.
먼 곳에서 위로하기 위해 온 친구들이 함께 7일간 앉아 고난의 슬픔에 동참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에 일치되는 생각이 있었다.
그것은 욥이 이런 끔찍한 고통과 시련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일 것이고, 하나님의 심판이라면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그냥 심판을 하실 리가 없으므로 그는 죄를 지은 것이 틀림없다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그들은 욥을 향해 ‘넌 죄인이다’, 욥은 ‘난 아니다.’라는 논쟁으로 빠져든다.
이것이 욥기의 절대분량을 차지한다.
왜 성경은 간단하게 이 문제를 설명하지 않고 긴 논쟁과 그 논쟁이 깊어져 감정싸움까지 가고, 나중에는 또 다른 한 젊은이가 끼어들어 또 더욱 고통을 더하는 말들을 장황하게 기록하는 것일까?
분명 하나님은 고난 가운데 우리가 갖게 되는 혼란과 의심, 억울함 등 모두를 확인시키면서 하나님은 이런 것들을 다 알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욥의 친구들은 욥을 위한다면서 말로 상처를 주면서 정죄와 자기변호의 논쟁이 계속된다.
논쟁이 각도는 조금씩 달라지지만 말의 정죄요지는 변함이 없다. 마치 우리의 다툼처럼.
답을 찾지 못하고 공회전을 한다.
그때 하나님은 나타나셨다.
무엇을 하셨는가?
하나님이 나타나셨다면 무엇을 해야 한다고 보는가?
뜻밖이었다.
하나님은 친구들과의 논쟁의 옳고 그름을 가려주지도 않으시고, 욥의 문제도 해결해주지 않으시고, 또 왜 고난이 왔는지도 알려주지도 않으신다.
그러면 뭘 하셨는가?
욥기를 봤다면 알 것이다.
자연과 생물과 괴물들을 묵상하게 하는 말씀들을 하신다.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가?
크게는 두 가지가 의도가 있을 것이다.
하나는 이 엄위하신 창조주 하나님 앞에 네가 하나님이 따지고 탄식을 늘어놓을 수 있는가? 하는 반문이고, 또 하나는 이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나의 일을 모르시고 감감하여 섭리하지 않으실 리가 없다는 깨달음을 주시는 것이다.
욥은 자기가 원하는 것에 대한 그 어떤 답을 얻지 못했다.
구하는 대로 주신다고 하는 말씀은 여지없이 빗나간다.
그러면 이런 것들을 어떻게 정리해서 이해해야 하나?
하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분명히 보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신뢰하고 따르게 하신다.
“내가 이전에는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하나님을 직접 뵙습니다.”
이것은 시각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지각의 문제이다.
당신이 이 말을 알아들어 줬으면!…
비록 현실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믿고 붙들고 살면 하나님이 인도하신다는 믿음, 오늘의 결과가 당신을 믿음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이 당신의 삶을 이끄는 것이다. 믿음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니까!